“화장은 밝은 톤으로” 황당한 업무예절
“화장은 밝은 톤으로” 황당한 업무예절
  • 강석영 기자
  • 승인 2020.09.07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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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착오적 규범에 성인지감수성 부족·권위 의식 논란

“승강기내에선 잡담을 금하고 악수를 하지 않으며, 시선은 층계 표시등이나 벽에 부착된 글자를 보는 것이 예의이다. 아파트나 호텔 승강기에선 여성이 타면 남성은 모자를 벗어 손에 들어야 한다. 남녀가 같이 문을 들어서고 나갈 때는 남성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거나, 나가서 여성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이 좋다. 좁은 계단을 올라갈 때는 남성이 여성보다 앞서고, 내려갈 때는 여성이 앞서는 것이 예의이다.”

2020년 6월 제주연구원 제주사회복지연구센터에서 발행한 ‘제주형 통합복지하나로 시범사업 업무매뉴얼’의 직장예절 중 일부 내용이다. 여기에는 432쪽에 걸쳐 제주형 통합복지하나로 체계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과 업무방법 등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이 책은 지난 6월 개최된 ‘제주형 통합복지하나로’ 관련 워크숍에서 읍·면·동 주민센터 사회복지 담당자와 복지시설 관계자 등에게 배포됐다. 그러나 책을 접한 관계자들은 뜻밖의 내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문제가 된 부분은 부록으로 기재된 ‘직장예절’로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사회복지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여성의 옷차림부터 화장법까지

“여성 신입직원의 경우, 무엇보다 단정한 헤어스타일이 중요하다. 머리가 짧은 경우 커트머리로 연출하면 되고, 머리가 긴 경우에는 뒤로 묶는 것이 좋다. 화장은 자신의 얼굴보다 조금 더 밝은 톤으로 번들거림이 없이 하고, 너무 진하거나 어두운 립스틱은 피하는 것이 좋다.”

8월 4일 국회 본회의에서 ‘원피스 복장’ 차림으로 등장한 류호정 정의당 의원에 대한 갑론을박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권 지지층 사이에선 ‘국회의원 복장이 맞느냐’, ‘술 값 받으러 왔느냐’는 등 성희롱성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만, 일부 여론에서는 ‘과도한 엄숙주의를 깨뜨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회에서 복장 논란이 불거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3년 유시민 국민개혁정당 의원은 ‘흰색 면바지’를 입고 국회에 입성하면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오래전부터 복장에 대한 과도한 관행을 깨려는 시도가 정치권에서 이어져왔다. 이들에겐 복장은 단순히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시대에 대한 저항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옷차림·화장법에 대한 규범화는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때문에 옷차림을 규범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사회복지 관계자 A씨는 “옷차림은 예로부터 신분을 나누는 역할을 해왔다”며 “옷차림새를 예절로서 규범화한다는 것은 다시금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상급자 중심의 직장예절… 권위 의식 팽배

“(신입사원의 경우) 상사의 부름이 있을 경우에는 ‘예’하고 대답하며 즉각 일어선다. 상사 책상의 앞이나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듣는다. ‘못 하겠다’, ‘무리다’ 이 두 가지는 가급적 하지 않도록 하자. 잡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심부름 등 직장 내 잡무를 부탁 받았을 때 하찮게 보이는 업무라 할지라도 조직 운영에 있어서는 필수 불가결한 업무라는 점을 명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책에 기술된 신입사원 직장예절은 상급자 중심의 권위주의적 직장문화의 예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그러나 이러한 권위주의는 다른 쪽에 기술된 식사예절, 술자리예절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식사예절과 술자리예절은 해외 사례와 비교해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해외의 경우 포크와 나이프를 그릇 위에 올려놓는 방법, 술을 그만 마시겠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방법 등 일종의 상호간의 약속이 대부분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상급자보다 술잔을 높이 들어선 안된다’는 등 수직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사회복지 전문가 B(여)씨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책이 올해 발간됐다는 것이 가히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B씨는 “도대체 이러한 내용이 사회복지 업무와 무슨 관련이 있길래 기술됐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연구자의 권위주의적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고 강조했다.

논란일자 일부 삭제… 연구 의뢰한 道 전혀 몰라

논란이 커지자 책을 집필한 제주연구원 사회복지연구센터 연구원 H씨는 책을 받은 관계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일부 쪽을 삭제(절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H씨는 “매뉴얼에 많은 내용을 담아 빠른 시간 내에 만들어야 된다는 연구진의 마음이 앞서 일부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내용이 포함된 것을 검수하지 못한 채 제작됐다”며 “향후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H씨의 삭제 요청에도 논란은 계속됐다. 문제가 제기된 문장은 363~382쪽 총 10장 전반에 걸쳐 기록돼 있었지만 H씨는 이 또한 제대로 검수하지 않은 탓에 단 2장만 요청한 것이다.

이를 두고 사회복지 전문가 C씨는 해당 연구원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C씨는 “단순 실수를 했다고 보기보단 문제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연구진의 성인지감수성과 권위 의식이 상당히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책을 발주한 제주특별자치도는 검수도 전혀 하지 않은 채 책을 배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주도 보건복지여성국 복지정책과 관계자는 취재진과의 전화통화 도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잠시 연구원과 이야기를 나눠보겠다”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취재진에게 걸려온 전화에서 도 관계자는 “책이 일부 배포됐음에도 검수를 꼼곰히 하지 못한 것은 인정한다”며 “일부 배포된 책은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모두 회수하고 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겠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아(오라동, 더불어민주당) 도의원은 이번 사태를 두고 제주도의 성인지감수성에 대한 민낯이 드러났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 의원은 “행정에서 이런 매뉴얼을 발간할 경우 법적으로 검토 보고하게끔 돼 있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성인지감수성에 대해 도에서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는지 그 실체가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이 의원은 “5년, 10년 전이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문제가 될 법한 내용”이라며 “제대로 검수하기 힘든 상황에서 굳이 부록으로 넣은 것은 무리수를 둔 것”이라고 말했다. 강석영 기자 jejuk0001@daum.net

※ 본 기사는 제주경제 매거진 2020년 9월호에 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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